양반전(兩班傳)
'양반전'은 '연암집'의 '방경각외전'에 실린 7편의 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연암의 단편 가운데서도 '호질', '허생전'과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연암의 사상과 문학관
실학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학이 성리학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리학의 변동된 연장이라는 입장이다. 연암은 전자에 해당한다. 당시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청대 고증학과 서구 과학문물을 접함에 따라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풍이 크게 고조됐다. 그러나 연암은 성리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는 연경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중국의 곡정 왕민호와 논변하는 가운데 주자를 추켜세웠으며, 그가 율곡의 기발리승일도설의 성리설을 추종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자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청나라의 과학적 문물과 합리적 학문태도를 받아들여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려는 현실주의자였다.
양반전 내용
강원도 정선에 인격적으로 고매하여 뭇 사람의 존경을 받는 양반이 있었다. 군수가 부임하면 이 양반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였다. 그러나 가난하여 빌려간 관곡이 1,000석이다. 심청이 공양미 300석도 많다 했는데, 이 양반의 1,000석은 많아도 너무 많다. 하여튼 빌린 관곡이 밀린 것을 순찰 중인 관찰사가 알았다. 관찰사는 군수에게 양반을 잡아들이라 명했고, 곤란한 처지의 군수는 망설이던 차에 관곡이 들어왔다.
군수는 궁금하여 양반네를 방문하여 물었다. 재산을 많이 모은 천민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양반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관곡을 대신 갚고 양반을 샀다는 것이다. 군수는 양반을 사들인 부자를 불러들여 문권(文券: 공적인 문서나 서류)을 만들어야 한다며 고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문건을 만들었다. 문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 관곡을 갚으니 그 값이 1,000곡(斛)이다. 양반을 일컫는 말은 선비 · 대부(大夫) · 군자(君子) 등 여러 가지이다. 네 마음대로 하라. 더러운 일은 하지 말고 옛일을 본받아 뜻을 세운다. 오경(五更 :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는 항시 일어나서 유황을 뜯어 기름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고전을 얼음에 박밀듯이 외우고 (중략) 소를 잡지 않고 노름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온갖 행동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거든 이 문권을 가지고 관가에 나와 바로잡을 것이다.'
이 문건 내용을 들은 부자는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이와 같다면 한쪽은 너무 이익이고 한쪽은 너무 소해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달라'고 청했다. 군수는 다시 문건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그 백성이 넷이고,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선비다. 이것을 양반이라 일컬으니 그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대강 문사(文史)나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아도 진사는 된다. 문과 홍패는 두 자 밖에 안되지만 백물이 갖추어져 있는 돈주머니이다. (중략) 궁사(窮士)가 시골에 살아도 오히려 무단(武斷)을 할 수 있다. 이웃집 소로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일꾼을 데려다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홀만하게 여리랴. 네 코에 잿물을 붓고 머리끝을 잡아 돌리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자 부자는 혀를 빼물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시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서 죽을 때까지 양반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인물, 가난한 양반과 부자인 천민, 고을의 군수, 양반의 아내가 등장한다. 보통 소설은 주인공과 부차적 인물 또는 적대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형태를 취한다. '양반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양반인가 천민인가의 선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제목을 보거나 이야기의 전면에 부각된 인물은 양반이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양반은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소설에서 행동을 하고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천부인 것이다.
이 작품은 허위의 전도된 가치를 전면에 부각해 웃음과 신랄한 비판 정신을 보여주는 반면, 진정한 가치는 저변에 잠재시켜 놓고 있다. 천부를 통해 굴절된 양반의 허상을 노출시킨다.
이 소설은 양반의 권위와 상민의 신분상승 욕구를 충돌시켜 갈등을 고조시킨다. 신선인 줄 알았던 양반이 도적에 지나지 않다는 실추된 양반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상민의 도덕성과 순수성을 참신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이다.
정리
이 소설의 주제는 무능하고 위선적인 양반에 대한 풍자와 양반의 타락과 부패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은 당대의 특수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개별적인 전형인 양반과 천부의 모습을 절묘하게 부각한 점과 모순된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풍자와 고발을 했다. 당시 철저하게 소외되고 억압받던 상민 계급에 대해 애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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