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시조, 함흥형무소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오늘의 한글 뼈대를 세운 주시경 선생의 맥을 남에서 잇는 중요 국어학자이다.(북에서 주시경 선생의 맥을 잇는 학자는 이극로) 그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를 통해 한글 사랑을 이어가다가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함흥 옥살이 중에 '함흥형무소'란 시조를 지었다. 우리글을 지키다 옥살이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애통한 일이다.
함흥형무소
반룡산 좋다 하여, 유산차로 예 왔느냐?
성천강 맑다 하여, 뱃놀이로 예 왔느냐?
아니라, 광풍이 하 세니, 지향없이 왔노라.
벽돌담에 둘러서, 열 길이나 높아 있고,
겹겹이 닫힌 문에, 낮밤으로 지켜 있다.
지상이 척척(呎尺) 곧 천리라 저승인가 하노라
반룡산(盤龍山)은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산이다. '용이 서린 산' 같다는 이유로 이름이 지어졌지만 실제 큰 산이 아닌 함흥시 배산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성천강은 함경남도 금패령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외솔 최현배는 함경남도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모진 고문을 이겨내기 위해 시조를 지어 읊조렸다. '함흥형무소'는 그때 지은 옥에서 지은 시조다.
유산차(遊山次)는 구경 삼아 놀러 다니는 것을 말한다. 유산차도, 뱃놀이, 가당치도 않다. 광풍(狂風)이 하도 세서 지향없이 왔노라 읊조린다. 그는 주변을 묘사했다. 열길 벽돌담이 둘러 쳐진 속에서 암담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한글 가로 쓰기를 연구했다. 우리 말글을 목숨처럼 지킨 외솔 선생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외솔 선생은 '나날의 생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독방에서 두 해를 보내었으니, 나의 동무는 오직 책뿐이었다. 붓도 종이도 없고, 다만 나날이 시력이 줄어드는 눈으로 책을 보는 것뿐이었다.
아랫목은 식당 되고, 윗목은 뒷간이라,
물통을 책상 하여, 책으로 벗 삼으니,
봄바람 가을비 소리, 창밖으로 지나다.
앉으니 해가 지고, 누우니 밤이 샌다.
보느니, 옛글이요, 듣느니 기적이라.
궁금하다, 세계사 빛이 어드메로 도는고?
재판중이던 1943년 8월 이윤재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듬해 2월 22일에는 한징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일제의 갖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외솔 선생은 고문을 당할 때에는 '목총이 뎅강뎅강 부러져 나갔다'라고 회상했다. 동지들이 옥중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시조를 남겼다.
임이여, 어디 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오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찌하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임이여 못 살겠소, 임 그리워 못 살겠소
임 떠난 그 날부터 겪는 이 설움이라
임이여 어서 오소서, 기다리다 애타오.
봄맞이 반긴 뜻은 임 올까 함이러니
임은랑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
꽃지고 나비 돌아가니 더욱 설어하노라.
강물이 아름아름 끝간 데를 모르겠고
버들가지 출렁출렁 물속까지 드리웠다.
이내 한 길고 또 길어 그칠 줄이 없어라.
함흥재판소는 외솔 선생과 그 동지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는 예심종결 선언문에 의해 내려진 죄명이다. 함흥재판소는 사전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로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최현배에게는 4년, 이희승에게는 징역 2년 6월이 선고됐다.
선생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틀 뒤에 함흥지법의 출옥명령서를 받고 풀려났다. 그리고 8월 18일 오후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리고 친구들의 청에 의해 시조를 썼다.
백두산 높은 봉에, 서운이 애두르고,
삼천리 골골마다, 생명 봄 돌아왔다.
삼천만 합심 협력하여, 무궁 나라 터 닦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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