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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원조 무용가,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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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사진


아이돌이다.

1920년대 요정같은 최승희

요즘 아이돌 사진을 변색시켰다고해도 믿을 정도이다.

최승희(1911~1967)가 어렸을 때 신낙균이 찍은 사진으로 1920년대 촬영된 작품이다. 이 사진은 사진예술가 신낙균의 옛집 한옥 마루바닥 아래에 박혀있던 상자에서 1975년 최인진 기자가 발견해서 세상에 알려진 사진이다. 최승희의 발랄한 동작과 아름다운 미소가 한껏 빛을 발하는 이 사진. 충분히 최승희의 '춤 인생'에 대한 호기심이 들 수 밖에 없다.

최승희의 존재감

최승희가 신작을 발표하면 관객은 늘 만원이 될 정도로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193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파리 벨기에 등 유럽은 물론 남미 대륙까지 순회 공연을 다니며,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걸고 우리 춤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알린 일찌기 한류 존재감을 알린 국제 스타였다.

그녀는 170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미소와 선이 고운 춤선. 어느 하나 빠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보인 춤의 주제는 우리 문화에 있었다. 아래 사진들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봉산탈춤, 무당춤, 초립동, 승무 등 우리 전통과 토속을 재해석하여 스토리를 입혀 발표했으니 무수한 팬들이 생길 수 밖에.

최승희의 봉산탈춤 실연 사진
최승희의 무당춤
최승희의 보살출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물린 채 1미터 내에서 모든 동작을 소화하는 보살춤. 어린 신랑의 모습을 통해 우리 정서와 문화를 담은 초립동까지.
현대 무용과 우리 전통춤을 접목해 우리 춤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승희의 월북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가인 오빠 최승일의 친구 안막과 1931년 결혼한다. 한 살 손위인 안막은 일찌기 사회주의 계열 문학인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손꼽히는 이론가였다. 안막은 소설가 안국선의 당질이며,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안성현의 재종숙이기도 하다.

광복 후, 일찌기 월북한 안막의 뒤를 이어 최승희도 남편을 뒤따른다. 월북 후 그녀는 최승희무용연구소를 평양에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한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후 34년 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해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무용계에 미친 영향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작품으로는 영산춤, 에헤라 노아라, 달밤의 곡, 반야월성곡, 우조춤, 칼춤, 보살춤, 초립동, 고구려 무희, 광상곡, 가면의 춤, 승무,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방랑인의 설움, 봉산탈춤, 유격대의 아들 등이 있고, 북한에서 쓴 저서로 '조선 민족무용 기본', '조선 아동무용 기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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