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3일 째
아침부터 비가 뿌린다. 노년 구보는 많은 비는 아니라 판단하고 간단하게 도시락을 준비해서 방수가 되는 '오르트립' 자전거용 가방을 꾸렸다. 도시락이라야 우유 한 병에 냉장고에 있는 남은 백반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것이 전부다. 아니, 하나 더 있다. 며칠 전 수업 때 쓰려고 준비한 손가락 크기의 '홍삼양갱' 젤리 3개와 맛이 깔끔한 봉지 커피 두 개. 비가 올 걸 대비해서 접이식 우산을 꺼내 계단을 내려간다. 19층에서 내려가는 계단은 요령이 필요하다. 노년 구보는 내리닫는 다리와 버티는 다리 힘 조절에 신경을 쓴다. 노년 무릎은 쉽게 망가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비 오는 상태부터 점검했다. 가랑비 수준이다. 이 정도면 자전거 타는 데 지장이 없다. 곧장 자전거를 몰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있는 도서관을 향한다. 가는 도중 들리는 편의점, 커피 맛이 좋아서 늘 들리는데 가랑비가 오락가락해서 그냥 지나쳤다. 어제 먹고 남은 커피 컵이 자전거에 그대로 끼워있어서 도서관 뜨신 물에 봉지커피로 대신할 것을 생각한 것이다.
도서관
조용하다. 월요일이라 손을 꼽아보고 왔었다. 첫 주와 셋째 주가 정기 휴일이니 오늘은 아니려니 했다. 오늘이 29일 월요일. 역산을 했다. 22, 15, 8, 1. 이달은 1일과 15일이 쉬는 월요일. 오늘이 다섯째 월요일. 홀수 월요일은 쉬나 했다가, '대체휴일'을 생각했다. 27일이 석가탄신일인데 토요일이었다. 그래서 29일이 대체 휴일이 된 것이다.
구보는 짜증이 났다. 공휴일이 토요일이라 대신 월요일을 쉬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도서관은 특수한 기관이라 격주 월요일 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개관을 한다. 토요일 개관이 석가탄신일이라 쉬었으면 대체휴일은 개관해야 한다는 입장이 구보 생각이다. 아침에 본 포털 기사가 생각났다. '쉬는 날 같이 쉬게 하는 것이 좋다'는 댓글이 떠올랐다. 갸웃했는데 현장을 대하니 허탈하다. 이런 날은 금남 245의 전일로 가야 한다. 설날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항상 여는 곳이다. 자전거로 전일까지는 5킬로 정도 된다. 지하철 이동도 가능하나 오르고 내리는 것이 번거롭다. 도서관을 나와 성진초를 돌면 커피가 맛있는 편의점이 있다. 기는 길에 생략했던 커피를 시켰다. 주인은 알아보고 '커피요?' 한다. 이 집 커피는 막 내린 크레마가 맛이 예술이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특유한 향과 맛이 아침을 즐겁게 한다. 크레마만 쭉 훑고 자전거 케이지에 끼고 달린다. 가랑비가 기분 좋을 만큼만 적신다. 남방과 어깨를 살짝 적시는 수준. '오르트립' 백팩은 이런 경우에 좋다. 마대처럼 단순해서 비가 들칠 여지가 없다
9시 10분
큰 딸 전화다. '엄마 어디 갔어?' '아니!' '전화가 꺼져서' '방전됐겠지'
윤이는?
'낮잠 1' 중이야.
일?
응.
'낮잠 1', '낮잠 2', '낮잠 3' 으로 나뉜다고 한다. 백일 지난 지 얼마 안 된 손주 얘기다. 자전거 주행 중에도 블루투스 헤드셋은 이런 경우 좋다. 열 시 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사직도서관'도 쉰다는 것은 짐작되나 '혹시나?' 생각에 기독병원 장례식장을 지나자 바로 선교사 언덕 쪽으로 틀었다. 물론 휴무다. 사직도서관은 앞에 지붕 있는 테이블이 있다. 어제 작업하던 사보 작업을 끝내려고 Aser를 꺼냈다. 에이서는 뭉툭하게 생긴 구보가 쓰는 노트북이다. 요즘 노트북 답지 않게 두텁고 무겁다. 가성비 중심으로 구입한 이유는 QGIS나 사보 프로그램을 다루려면 뽀대보다는 기능이 중요하다. 이것 때문에 가방도 방수가 되는 '오르트립'으로 구한 것이다.
'10시 되면 전일로 가야지' 하고 펼친 일이, 시간이 돼도 접을 수가 없다. 그간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친구 균이 전화다. 오늘 자전거 주행이 중단됐다고 한다. 내 일정을 묻는다.
'비에 갇혔어'
친구는 '전일'로 올 요량이었다. 이동하지 못한 사연을 얘기하다 보니 내가 갇혀 있는 것이 실감됐다. '보리밭', '그집앞', '임을 위한 행진곡'을 어제 사보 했다. 속도 조정을 못했는데 그걸 맞추기에는 빗속이 딱이다. 컴퓨터 사운드를 키운 상태에서 늦추기를 몇 번 하고서야 결정했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빠르기 결정이 쉽지 않다. 전인권의 무반주 가창을 듣고서야 '65'로 맞췄다. 발성반에서 발표곡으로 이것을 선택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어서 '사공의 노래'와 '선구자'까지 마쳤다. 어제 작업과는 달리 제목에 번호를 붙였다. 발성반 교재 페이지를 추가한 것이다. 속도는 '사공의...'는 75, '선구자'는 80으로 했다. '임을...'에서 워낙 많은 고민을 했던 탓에 다음은 쉽게 풀렸다.
구보 비슷한 또래 사나이가 탁자 앞 자전거 옆에 앉는다. '비가 새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전화받는 사람 질문이 답답하다는 듯 답하고, 끊으면서 '미안'하다고 인사한다. 웃으면서 목례만 하고 일을 계속했다. 도서관 휴무 건을 화제로 삼는다. 마침 생각했던 것이 있어 대거리를 했다. '비가 오는데 태극기를 그대로 뒀다'라고 불만이다. 태극기 얘기가 나오자 구보는 신중 모드로 접어들었다. '혹시...' 그 부대? 그는 공무원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공감했다. 그러나 반응은 삼갔다.
구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만 남기고 갔다. 아마 내 태도가 말 걸기가 거북했던 모양이다.
이이남 스튜디오
'전일'로 옮기려는데 비가 다시 뿌린다. 그렇잖아도 '이이남 스튜디오'로 갈까 했는데... 아예 작심했다. 스튜디오로 오르는 길을 그대로 올라 챘다. 자전거로 늘 해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앞 2단, 뒤 1단으로 가볍게 성공이다. 고소한 커피라고 이름이 쉽잖은 커피를 따뜻한 것으로 시켰다. 비가 와도 사람이 많다. 키피 마시면서 작품을 감상하려는데 음료는 나 두고 가라 한다. 결국 1층에서 자리를 폈다.
비가 그쳤다.
일어섰다.
오후 2시 35분이다.
모든 그림은 '빙드로우'를 이용한 '달리'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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