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이황은 조선전기 성균관 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1501년(연산군 7)에 태어나 1570년(선조 3)에 사망했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나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이후 고향 퇴계에 은거하여 학자의 삶을 삽니다. 명유들과 토론하고 『주자대전』 등 주자학 관련서적을 주해·편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거대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합니다. 사후에 고향 사람들에 의해 '도산서원'에 모셔지고 1609년에 문묘에 배향됩니다.
도산십이곡 중 언학(言學)
도산십이곡의 전6곡은 자연을 노래합니다. 후6곡은 '학문'에 대해 노래합니다. 자연과 학문을 노래하는 성리학자, 우리나라 풍류도에 가깝지 않을까요.

제7곡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玩樂齋) 소쇄(蕭灑)한듸
만권 생애(萬券生涯)로 낙사(樂事)ㅣ 무궁(無窮)하얘라
이 듕에 왕래 풍류(往來風流)를 닐러 므슴할고
천운대 돌아들어 완락재 깨끗한데
만권 생애로 즐거운 일이 무궁하여라
이 중에 오가는 풍류를 일러 무엇할까
제8곡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야도 농자(聾者)는 몯 듣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야도 고자(瞽者)는 몯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耳目聰明) 남자(男子)로 농고(聾瞽)갇디 마로리라
번개가 산을 깨도 농자는 못 듣나니
밝은해가 하늘에 떠도 소경은 못 보나니
우리는 눈귀 밝은 남자로 농자와 소경 같지 말리라
제9곡
고인(古人)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古人)을 몯 뵈
고인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패 잇내
녀던 길 알패 잇거든 아니 녀고 엇덜고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보네
고인을 못 봬도 행하던 길로 가르침 있네
올바른 길 앞에 있는데 따르지 않고 어쩌겠나
제10곡
당시(當時)예 녀든 길흘 몃 해랄 바려 두고
어듸 가 단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아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당시에 학문 길을 몇 해씩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나
이제야 돌아왔으니 딴마음먹지 않으리
제11곡
청산(靑山)안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난 엇뎨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 상청(萬古常靑)호리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로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않고 만고상청하리라
제12곡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듕에 늙난 주를 몰래라
우부도 알면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라라
후기
퇴계 같은 성리학 대가가 시조를 지었다는 점이 우리 문학에 학자들의 기여가 엿보입니다. 물론 성리학자로서 시조가 너무 세속적으로 흘러 본을 보인다는 발문이 있습니다. '나는 본디 음률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는 싫었다. 병을 돌보며 한가히 지내면서 마음에 느낀 바 있으면 바로 시로 읊곤 했다.'라는 당신이 시를 지은 속내를 비쳤습니다. 그리고 시조를 '노래'로 읊어야 맛이 있기 때문에 '시속의 말'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유익하기를 바란다는 발문 마무리가 있습니다. 역시 성리학자로서 빈틈이 없습니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에게 노래를 익히게 하고 자신도 틈내어 부르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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