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 사가독서(賜暇讀書)
세종은 1420년(세종 2) 3월에 집현전을 설치한 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 휴가를 주어 독서 및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역시 뛰어난 군주 세종의 안목 높은 정치를 엿볼 수 있다.
제도의 유래와 변천
사가독서제도가 최초로 실시된 것은 1426년 12월로서, 왕은 권채(權採)·신석견(辛石堅)·남수문(南秀文) 등 3인을 선발하여 관청공무에는 관계없이 연구에만 몰두하게 하였는데, 그 규범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독서를 한 장소는 자택이었다.
1442년에는 신숙주(申叔舟) 등 6인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한다. 그 뒤 1451년(문종 1)에는 11인이, 1453년(단종 1)에는 4인이, 세조 초기에는 14인이 상사독서의 방법으로 학문과 인격을 연마하였다.
제도의 중단과 부활
1456년(세조 2)에는 집현전과 함께 사가독서제도가 중단되었으나, 성종이 즉위하여 예문관(藝文館)을 설립하고 사가독서를 부활시켰다.
1476년(성종 7)에는 채수(蔡壽) 등 6인에게 독서휴가를 주었고, 1483년에는 용산(龍山)에 있는 빈 사찰을 증축하여 독서당을 만들어서 사가독서제도를 활성화시켰다.
1504년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독서당과 이 제도를 폐지하였고, 중종은 1506년 11월에 다시 부활시키고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1517년에는 두모포(豆毛浦)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하여 사가독서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75년 동안 이 독서당은 사가독서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임진왜란 후
임진왜란 이후 사가독서제도는 중단이 되었으나 1608년(광해군 원년) 대제학 유근(柳根)의 청으로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으며, 인조 때 병자호란이 있은 뒤 활성화되지 못한 채 영조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규장각의 설립과 함께 폐지되었다.
정리
시대에 따라 부침은 있었으나 인재 양성을 위한 독서 제도는 조선시대에 꾸준하게 이어졌다. 사가독서제에 선발된 문신에게 주어지는 기한은 최단기인 경우 1개월에서 3개월이었으며, 최장기인 경우에는 달수를 표시하지 않고 ‘장가(長暇)’라고만 하였다.
1차의 사가독서에 선발되는 인원은 보통 6인 내외였으며, 많을 때는 12인까지, 적을 때는 1인만 뽑힌 때도 있었다. 1426년부터 1773년(영조 49)까지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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