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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독서/교양도서

[고전소설] 기재기이(企齋記異)의 신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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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 신광한(申光漢)

신광한은 조선 초기 관학을 주도한 신숙주의 손자이다. 기재 신광한은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사가독서란 인재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특별히 휴가를 주어 공부와 연구에만 몰두하도록 배려한 조선의 인재 양성 제도이다.

1513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교리·정언(正言)·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로 몰려 여주 생활이 시작됐다.

여주의 집필 활동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했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企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는 여주 칩거 기간에 많은 글을 썼다. 남한강이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많은 독서와 집필을 했다.

마음은 긴 강 흐르는 물처럼 맑고, 몸은 뜬구름처럼 시비가 없이 자유롭다. 이 몸이 겨를이 많으니, 따르는 것은 오직 흰 갈매기로구나. 아,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관한 말이 내 귀에 들려올까 두려워한다는 뜻의 노래도 이때 남겼다.

기재기이

최광한의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

용추폭포는 지금의 동해시에 있는 두타산 용추골에 있는 경관 좋은 폭포와 암반이다. 최생은 '청낭비결'을 읽다 창을 여니 아름다운 가을 하늘에 표연히 떠날 생각을 한다. 같이 공부하는 증공에게 의견을 묻는다. 증공은 두타산을 손바닥 보듯이 알지만 용추골은 엿보았을 뿐이라고 답한다. 사방이 막힌 용추골 접근은 미끄러운 바위를 지나야 한다고 했다.

더욱 호기심이 생긴 최생은 용추골로 나섰으나 증공의 말대로 미끄러운 바위에서 그만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최생은 날개가 생긴 듯 땅에 안착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만화문에 이른다. 호위 병시들에 의해 어는 안가에 도착했고 손님 접대 중인 왕을 만난다. 왕은 최생에게 자리를 권하고 최생의 글을 요청한다. 최생의 글을 본 왕과 손님은 최생 식견에 감탄하고 두루 글로 화답하며 자리가 익어간다. 그리고 10년 살이 티켓을 발행한다. 최생은 같이 공부한 증공을 만나고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고 그들이 제공한 학을 타고 절로  귀환했다. 증공을 만나 많은 날이 지난 것을 알고 놀랬다.

'나는 이 일이 하루 걸렸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니?'

그 후 최생은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이후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증공은 무주암에 늙도록 거처하며 이 일을 자주 이야기했다면서 소설 '최생우진기'는 끝난다.

정리

조선 시대 판타지 소설이다. 신광한은 호기심 많은 최생이 공부 중에 용추골에 빠져 신선 세계를 만난다. 최생의 식견 덕분에 왕과 합석하여 대접받고 십년살이 크레디트까지 발급받았으나 같이 공부하는 증공을 만나로 환속했다가 산속 약초를 캐러 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이 얘기를 증공이 늙도록 스토리텔링을 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작가 신광한이 한문소설로 남겼다.

달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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