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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여행

나주 자전거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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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50년지기 친구가 왔다.
대전에서 자전거투어를 위해 왔다.

사실은 광주과기대 교수 시절 동료들 모임에 참석차 왔다가 같이 자전거 라이딩을 하게 됐다.

친구는 어제 모임 장소를 자전거로 찾아갔단다. 헐~

풍암정까지.

음식점 '풍암정'이 아니라 충장공의 아우 김덕보가 지은 '풍암정'. 산장 올라가는 비탈길 따라 갔단다.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자전거 타본 사람은 안다. 공부머리하고 노는머리하고는 다른가 보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풍암정

풍암정은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하였던 풍암 김덕보(1571∼?)가 지은 정자로 '풍암'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김덕보는 임진왜란 때에 큰형 김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죽고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던 작은형 김덕령까지 억울하게 죽자, 이를 슬퍼하여 무등산 원효계곡을 찾아와 학문을 연구하며 평생을 살았다.

나주투어

친구는 국립나주박물관을 가고 싶단다. 내가 말렸다. 어제 생고생을 했는데 연거푸 혹사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나주투어'였다. 자전거로 쑤욱 지나가기 일쑤인 나주. 오늘은 본격적으로 나주 구시가지 자전거 투어를 시작했다.

먼저 나주 들입에 있는 5일장. 나주장은 4,9장이라 오늘은 맨숭맨숭하다. 우선 보물부터 보자고 나주동점문밖석당간으로 향했다. 석당간은 5일장 옆에 붙어 있다. 담양 석당간보다 규모도 크고 생김새도 뽀대가 있는 석당간인데 성밖에 있었다. 성안에는 나무당간이 있었다. 물론 나무당간은 지금 흔적도 없다. 동점문은 복원됐지만 나주읍성 성벽은 없다.

나주동점문밖석당간

주변에 전봇대와 거미줄처럼 가로지르는 전선들로 맥을 못추고 있다만, 자세히 보면 폼이 난다. 지역 정부나 문화재청은 뭐하는지. 보물로 지정했으면 대접을 해야지. 주변 전봇대 지중화 사업이라도 해야되지 싶다.

길동 형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5일장 나주곰탕 집이 어디냐고?'
'길가네'라고 답하신다.
길가는 여사장님 성씨였다.
길가네에서 '수육곰탕'을 시켰다. 장날도 아닌데 손님이 많아 한참을 기다렸다. 친구는 여사장 옆을 지키는 가마솥이 신기한지 앵글을 들이댄다. 길여사님은 바빠 눈코 구별도 힘든 상황이다.

4대째 이어온다는 길가네 곰탕 3대 여사장과 가마솥

4대 여사장은 어디가고 나이든 왕사장님이 그리 고생하냐고 물으니, 4대 사장은 화순에 분점을 내서 거기 있다한다. 대학 4년을 장학생으로 다녔다며 '아깝다'는 말을 되뇌이는 부부. 내가 한 말씀 드렸다. 음식업이 얼마나 수고롭고 가치있는 일이다는 것을, 그런 인재들이 음식을 정성껏 만드는 일은 훌륭한 일이라고. 말대접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돼야 제대로된 나라이지 싶다.

여튼 잘 먹었다.

고기도 좋고 국물도 뒷맛이 좋다. 참 묵은지가 일품이었다. 하긴 나주곰탕하면 잘 삭힌 배추김치가 빠질 수 없다.

목사내아와 나주목문화관

나주는 목사골이다. 나주목에서 금성현으로 강등됐다 다시 명예회복 되기를 몇번 했던 고을이다. 옛날에는 지역에 역적이 생기면 지역까지 연좌제로 묶인다. 광주도 필문 이선재 덕에 급이 올랐다가 그 후손 이발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강등된 적이 있다. 임금이 나라 주인이던 시절 얘기다. 아니,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기간제 왕들이 바뀌면 지역까지 덩달아 연좌제로 묶인 것처럼 무시 받으니 말이다.

목사내아는 목사의 살림집이다. 요새말로 사택이다. 동헌에서 업무는 보고, 잠은 내아에서 자고.

목문화관 전시물 중 나주목 내력

목사내아 옆에는 '나주목문화관'이 있다. 나주 이해를 돕는 전시물들이 제법 구색을 갖췄다.

금성관

금성관은 객사다. 객사란 외국사신이나 국빈이 방문했을 때 묵는 곳이다. 한편 지방 수령들이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객사에 궐패나 위패를 모시고 북향하여 예를 올리는 것으로 지방에 있으면서 임금께 충성서약을 하는 것이다.

2019년 보물로 지정된 금성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있던 것이 2019년 10월 25일 보물 제2037호로 지정됐다. 이 자랑스런 건물을 일제강점기에 군청 사옥으로 썼다. 일본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 자존심이라 생각될 것들은 개무시당했다. 성문도 성터도. 이런 참혹한 결과가 지금까지 남았는데도 진정한 반성없는 일본 지도층들, 참 못됐다 싶다. 일본 국민 모두를 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최근 아베를 비롯한 제국주의 꿈을 못버리는 그들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진실된 일본인에게는 좀 미안하다만 정치하는 우익 인사들은 너무 염체가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금성관을 나와 향청을 향했다. 지금은 경로당으로 쓰이는 건물이 조선시대 때 향리들이 일을 보던 향청이었다. 여기는 잘 생긴 소나무가 있다. 거대한 용이 하늘로 치솟는 형상을 한 소나무. 경노당으로 건물이 훼손되면서 소나무까지도 그 위용값을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보물 제394호 나주향교

향교는 크게 두가지 기능이 있다. 교육 기능과 제향 기능이다. 공자를 비롯 유학에 공이 있는 분들에게 제사를 모시는 제향 공간이 앞에 있냐 뒤에 있냐에 따라 전묘후학, 전학후묘로 나뉜다. 나주향교는 대표적인 '전묘후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주향교는 뒤쪽에 배치된 강학 공간의 규모가 대단하다. 기숙사 기능을 하는 동제, 서제가 넓직한 마루를 갖춘 모습이 장쾌하다.

서제 마루에서 바라본 열을 선 잘 생긴 굴뚝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공립학교인 셈인데 나주향교 규모로 봐서 이 지역 공교육 내실이 튼실했지 싶다. 지금은 서구에서 들어온 교육 시스템으로 향교의 교육 기능이 변경됐지만 나주향교는 여전히 아동의 과외활동 교육에 지속적으로 공헌하고 있다.

향교 옆에는 서성문이 있다. 나주 4대문 중 서문이다. 서문 인근에 옛 성터가 남아있다. 나주 시민들의 노력으로 아무렇게나 들어섰던 건물들이 정비되고 성터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성터를 따라 나주천으로 나서면서 좌로 쭉 빠지면 남파고택이 나온다. 남파고택의 초가는 1884년에 지었다. 그해에 미공사관 무관인 해군 소위 포크가 11월에 나주에서 이틀을 묵어간다. 그런데 불행히도 포크 일행과 나주 건축노동자들이 집단 패싸움을 하게된다. 포크는 그 내용을 자신의 저서에 소개했다. 당시 싸움에 휩싸인 노동자들이 남파고택 작업 인부는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긴 그때 금성관도 보수 공사가 있었다. 포크의 객사 이용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객사가 이용할 여건이 이니었지 싶다.

남파고택은 현재 사람이 기거하고 있기에 들리지 않았다. 초가지붕만 밖에서 살피고 그대로 '예가체프'로 향했다. 예가체프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주인 덕분에 '안성현'을 기념하는 공간이 있다. 안성현은 1920년 나주 남평면 대교리에서 태어나 음악을 전공하여 성악 및 작곡을 했다. 대표곡으로는 '부용산'과 '엄마야 누나야'가 있다. 후자는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곡은 아니다. 안성현은 전남여고를 비롯 이 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월북음악가로 기피 인물이 된 안성현을 고향 사랑이 지극한 나주시민들의 노력으로 그의 음악적 성과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예가체프 2층 안성현 음악홀

안성현은 걸출한 원조 한류 무용수 최승희와 관련이 있다. 최승희는 오빠 최승일의 친구 안막과 결혼한다 그 안막의 재종질이 안성현이다. 재종질이란 촌수로는 7촌 조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안성현의 아버지 안기옥과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재종간이다. 안성현의 아버지 안기옥은 가야금 명인으로 안막의 형님 뻘이었다.

예가체프에서 커피와 치즈과자로 입가심하고 광주로 향했다. 승촌보에서는 '누가바' 아이스께끼로 추억을 맛봤다.

50년지기 친구와의 하루는 이렇게 보냈다.

1967년 광주서중 3학년 4반 시절을 되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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