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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여행

[답사] 나주 금안리의 서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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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노안면 금안리는 명촌으로 호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을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을과 주변에는 세 서원이 있다. 사암 박순을 모신 '월정서원', 설재 정가신을 모신 '설재서원' 그리고 환훤당 김굉필을 모신 '경현서원'이 모두 십리 이내에 있다.

월정서원(月井書院)

월정서원은 경현서원과 함께 16~17세기 나주지역 사족들의 활동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659년(효종 10) 나주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思菴 朴淳)의 학덕을 흠모하던 도내 유림들에 의해 서원건립이 발의되었고 홍탁이 상소를 올려 1664년(현종 5)에 금성산 월정봉 아래에 창건되었다. 1669년(현종 10) 사액이 내려졌다.

월정서원 안내

서원은 많이 묵어 있었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담 너머로 볼 수 있는데 사람의 흔적이 없다. 울 밖으로 넘어온 모퉁이에 선 은행은 수년간 쌓인 은행알이 겹으로 바닥에 깔려 있는데 가관이다.

담으로 넘겨본 월정서원

여름이면 푸른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노란 잎을 떨어뜨리면서 함께 생산했던 은행알이 겹겹이 층을 이뤘다. 서원보다 설치미술 격인 은행알이 더 흥미롭다. 이게 싹이 트지 않고 그대로 나뒹구는 것도 특이했다.

몇 겹으로 쌓인 은행 알

정오삼선생이 찾다가 못 찾고 돌아서려는데, 마당 저편에 '월정서원복설기적비(月井書院復設紀蹟碑)'가 서 있다.

월정서원복설기적비

세월 속에 점점 잊히는 유물은 슬퍼 보였다. 남루한 옷을 걸친 채 돌어서는 객들에게 힘없이 손사래를 치는 월정서원을 뒤로하고 설재서원으로 이동했다.

설재서원(雪齊書院)

설재서원은 금안리 옆 마을 영평리에 있었다. 금안리에  있을 것이라는 우리 기억과는 달랐다.

이 서원은 고려시대 문신 설재 정가신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 금안동에 창건되었다. 숙종 19년(1693)에는 설재 선생의 5세손으로 세종조에 효자정려를 받은 정식의 위패를 추가해 모셨고, 숙종 38년(1712)에 사우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경종 3년(1723)에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로 옮겨 세워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했다.

설재서원 안내


설재 정가신(鄭可臣)

설재 정가신(1244~1298)은 고려 문신으로 뛰어난 문장가이도 하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해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가 있어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 · 대부(大夫)들과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과 같았다고 한다.

설재서원에는 700년 된 비자나무가 있다. 향교나 서원에는 일반적으로 은행이 많은데 이 서원에는 비자나무가 원목이 된 셈이다. 나주정씨 문중에서는 이 나무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비자나무 내력을 기록한 안내문

서원은 문이 잠겨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당인 설재사를 담밖에서 찍었다.

설재서원의 사당인 설재사

경현서원(景賢書院)

경현서원은 1583년(선조 16) 지방유림이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성산 아래(현재 나주시 경현동)에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 등의 발의로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4위를 함께 배향하여 오현서원(五賢書院)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당시 목사로 와 있던 목장흠(睦長欽)과 지방유림들이 합력하여 중건하였으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 김선(金璇) 등의 상소로 ‘경현(景賢)’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에는 기대승(奇大升)과 김성일(金誠一)을 추가배향하여 모두 7위를 모시게 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7년 전라남도 유림이 이곳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挾門), 4칸의 강당,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기대승·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현서원 연혁비

4칸의 강당은 평범한 민가처럼 보인다. 정선생은 피곤하다면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나더러 사진을 찍어오라 한다.

경현서원의 평범한 강당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어 일명 서원비(書院碑)라고도 한다. 당대의 인망이 높은 인사의 글을 받아 명필의 글씨로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서원은 본래 선비들이 모여 강학(講學)하는 곳을 말하나 조선시대는 모든 학자들이 추앙하는 현인을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원을 설립하는 데는 반드시 뜻이 앞서고 여기에 모시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며, 또 모든 유림의 뜻이 모아져야 했다.

경현서원 묘정비

강당에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경현서원 편액이 걸려있다.

경현서원 편액

함평 엄다 '자산서원'에서 출발한 정선생과 함께한 답사는 나주 노안 '경현서원'에서 마무리됐다. 옛 선비들을 모신 서원과 그들의 삶을 추적하면서 우리 조상님들의 기상을 새기는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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